주체108(2019)년 6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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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장군의 노래》를 작곡한 김원균선생에 대해 알고싶습니다

 

문 - 김일성장군의 노래》는 들을수록 김일성주석님의 불멸의 업적이 가슴뜨겁게 어려오고 부를수록 힘이 솟구치게 하는 참 좋은 노래입니다. 노래가사를 창작한 리찬선생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있는데 노래를 작곡한 김원균선생에 대해서는 알려진게 없더군요. 김원균선생에 대해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김재익 - 재미동포)

답 - 김일성상》계관인이며 로력영웅, 인민예술가인 김원균은 불멸의 혁명송가 김일성장군의 노래》와 《애국가》를 작곡한것으로 하여 우리 인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작곡가입니다.

1917년 1월 2일 강원도 원산시 상동에서 태여난 김원균은 원산제2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춘천에 있는 공업고등보통학교를 다니다가 일제의 학정하에서 학교를 중퇴하고 날품팔이로 연명하면서 살아갔습니다. 이때에 음악에 남다른 취미가 있었던지 하숙집의 바이올린을 얻어 한곡조씩 타기를 즐겼고 품삯대신 받은 낡은 기타를 타며 마음속 슬픔을 터놓기도 하고 실현 못한 배움의 꿈을 하소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1939년말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가족과 함께 살길을 찾아 평양으로 와서 《새동네》(지금의 평천구역 해운동)에 세집을 얻고 평양병기소에서 제도공으로 일하면서 5년동안 망국노의 비참한 노예살이를 강요당하였습니다.

1945년 8월 16일 수십만 군중들속에 끼여 《조선독립 만세!》를 목청껏 부르며 거리를 행진하다가 날이 저물녘에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억제 못할 감격과 흥분으로 저도 모르게 쏟아져나오는 가사와 선률을 불러보며 집으로 와서 선률을 적고 가사를 다듬어 붙였습니다.

꽃동산 삼천리 새 동이 튼다

새로운 아침에 광명이 왔다

나가자 앞으로 삼천만 동포여

앞으로 나가자 민주조선 만만세

김원균은 음악전문교육을 받은 음악가도 작곡가도 아니였지만 새 삶의 기쁨과 희열에서 흘러나온 그의 첫 창조물인 《조선행진곡》은 급속히 전국각지로 퍼지면서 새 조선건설을 위한 인민들의 투쟁을 힘있게 고무했습니다.

광복직후부터 북조선공산당 평안남도위원회 선전부 미술계장으로 사업하던 김원균은 1945년 10월 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 식장을 꾸리는 사업에 참가하였다가 력사적인 조국개선연설을 하시는 전설적영웅 김일성장군님을 연단가까이에서 뵈옵게 되였습니다. 천지를 진감하는 우뢰같은 만세의 함성, 환호하는 수십만 군중에게 답례하시며 우렁우렁한 음성으로 연설하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숭엄하신 모습에서 받아안은 감격과 충격은 그의 머리에서 오래도록 떠나지 않았습니다.

1946년 5월부터 평양시음악동맹 조직부장으로 활동하던 김원균은 어느날 불멸의 혁명송가 김일성장군의 노래》가사를 받아안게 되였습니다.

절세의 애국자이시며 민족의 태양이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불멸의 혁명업적과 수령님에 대한 전체 조선인민의 열렬한 칭송과 흠모, 민족적긍지와 자부심을 격조높이 구가한 가사의 구절구절을 읽어가는 김원균의 눈앞에는 력사적인 개선연설을 하시던 그날 수십만 군중의 환호의 꽃바다우에 거연히 서계시던 위대한 수령님의 거룩하신 영상이 안겨왔습니다.

그날의 감격과 흥분을 새겨안으며 그는 밝고 환희적이면서도 경건하고 숭엄한 송가적특성과 힘있고 전진적인 행진곡적성격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선률을 창작완성하였습니다.

태양의 송가 김일성장군의 노래》는 삽시에 전국의 방방곡곡으로 보급되여 인민들이 가장 사랑하고 즐겨 부르는 노래로, 투쟁의 고무적기치로 되였으며 김원균은 온 나라가 다 알고 온 세상이 아는 재능있는 작곡가로 되였습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김원균은 작곡가로서 영광넘친 인생의 첫 걸음을 떼게 되였습니다.

1946년 8월부터 평안남도인민위원회 문화부 문화예술계장으로, 그후 북조선음악동맹 조직부장, 제1군관학교 음악교관 및 민청위원장으로 활동하던 김원균은 이 시기 새 조선의 슬기와 기상을 구가한 《애국가》와 《민주청년행진곡》을 비롯한 시대의 기념비적명곡들을 창작하여 작곡가로서의 뛰여난 기질을 뚜렷이 보여주었습니다.

미제의 무력침공을 반대하는 조국해방전쟁시기 김원균은 내무성협주단 창작부장으로 사업하며 전선과 후방의 여러곳에서 공연활동을 하는 한편 가요 《강철의 대오는 전진한다》, 《우리의 최고사령관》 등의 노래들을 창작하여 군인들속에 보급했습니다.

그러던 1952년말부터 김원균은 준엄한 전쟁의 포화속에서 승리의 래일을 내다보시며 전문기술인재들을 전망성있게 키우시려는 위대한 수령님의 배려로 모스크바 챠이꼽스끼명칭 음악대학에서 공부하게 되였습니다.

김원균은 1958년에 공화국창건 10돐을 계기로 창조공연된 음악무용서사시 《영광스러운 우리 조국》(3천명 대공연)창작에 참가하여 관현악과 합창으로 된 서장부분을 맡아 창작하였으며 천리마시대 정신을 반영한 가요 《우리는 천리마타고 달린다》를 창작함으로써 천리마운동에 떨쳐나선 인민들의 로력투쟁을 크게 고무하였습니다.

1961년 7월에 그는 공훈예술가칭호를 받았습니다. 김원균은 1961년부터 평양음악무용대학 학장으로, 1964년부터 조선음악가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사업하면서 우리 당의 주체적문예사상을 음악예술창작과 창조실천에 구현해가기 위하여 적극 투쟁했습니다.

1950년대말부터 1960년대에 이르는 기간 《귀국동포환영곡》, 《빛나라 청봉숙영지》, 《반제투쟁가》 등의 가요들과 교향시 《향토》를 비롯한 여러편의 기악곡들을 창작하였습니다.

김원균은 1970년대와 그 이후 시기 영화음악극장 총장, 피바다가극단 총장으로 사업하면서 적지 않은 노래들을 창작했습니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조국청사에 길이 전해질 주옥같은 송가창작으로 수령님을 받들고 조국을 빛내여온 로작곡가를 끝없이 아끼시며 뜨거운 은정과 사랑을 베풀어주시였습니다.

1972년 4월 위대한 수령님의 탄생 60돐에 즈음하여 나라의 최고영예상인 김일성상》이 제정되였을 때 그 첫 계관인들속에 김원균을 내세워주시고 인민예술가칭호를 안겨주시였으며 1977년에는 최고인민회의 제6기 대의원으로 내세워주시였습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후 그의 생일 70돐과 80돐때에도 은정깊은 생일상과 함께 공민의 최고영예인 로력영웅칭호를 안겨주시고《김원균음악회》를 성대히 열도록 해주시였습니다. 또한 1992년 4월에는 우리 나라 최고영예훈장인 김일성훈장》을 수여하도록 크나큰 영광을 안겨주시고 1999년 7월에는 그의 건강을 념려하시여 귀한 보약재들과 함께 고급승용차까지 배려하여주시였습니다.

그는 1990년부터 피바다가극단 총장 겸 조선음악가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 사업하였으며 1994년부터 고문위원장으로서 주체음악예술발전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사업하다가 2002년 4월 5일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김원균의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안치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