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9(2020)년 9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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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의 장애자들에 대해 알고싶어요

 

문 – 제 동생은 10살때 교통사고를 당하여 하체가 마비되였습니다. 예술에 남다른 애착을 보이던 동생은 다리때문에 아무것도 할수 없게 되였습니다. 한살한살 나이가 먹어갈수록 성격은 더 거칠어지기만 해요. 《고통의 도미노》를 견디며 절규하는 동생을 볼 때마다 마음이 찢기는것 같아요. 북에도 물론 이런 장애자들이 있겠는데 그들은 어떻게 생활하는지요. 그에 대해 알려주세요. (쓸쓸이-지옥-아줌마)

* 그에 대한 대답은 조선장애자예술협회 부원 최강철동무의 이야기로 대신해드리겠습니다.

답 – 여러가지 원인으로 자기 몸의 한부분이 못쓰게 된다는것은 참으로 가슴아픈 일입니다.

우리 공화국에는 우월한 장애자보호정책이 있기에 장애인들은 육체적불편함은 있어도 좌절과 절망이란것을 모르고 행복하게 살고있습니다.

우리 공화국에서는 선생의 동생과 같이 예능에 소질이 있는 장애인들은 조선장애자예술협회에 망라하여 예술활동을 벌리고있습니다.

선생이 아마 조선장애자예술협회의 예술소조공연을 보시면 그에 대한 의문이 사라질것입니다.

실례로 가야금연주가인 공훈예술가 김명숙선생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김명숙선생은 앞을 전혀 보지 못하는 시력장애자입니다. 그런 상태에서도 그는 21개의 가야금줄을 정확히 짚어가는것은 물론 풍만한 음량과 독특한 음색, 세련된 연주기법으로 만사람의 심금을 울리고있습니다.

무릇 정상사람들도 성공하기 쉽지 않은것이 예술이라고 하지만 시력장애자로서 훌륭한 가야금연주기량을 발휘하는 김명숙녀성의 모습은 많은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고있습니다.

3살때 뜻밖의 일로 두눈을 잃고 5살나던 해에 아버지가 만들어준 작은 가야금과 첫 인연을 맺은 때부터 방송에서 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가야금을 제법 솜씨있게 다루어 《신동》으로 불리운 김명숙녀성.

그의 연주기량은 당시 가야금명수로 널리 알려졌던 평양음악무용대학(당시) 민족음악학부장이였던 정남희선생의 지도를 받으며 높은 경지에 올라서게 되였습니다.

그는 10대에 벌써 어른들도 힘들어하는 《가야금산조》전곡에 정통하고 민족악기를 가지고 전통음악밖에 연주할수 없다던 기성관념을 깨고 현대음악을 자유자재로 연주하여 예술계에 파문을 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나어린 그의 남다른 예술적재능을 소중히 여기시고 높이 내세워주신분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이시였습니다.

주체57(1968)년 11월 나라일에 그처럼 바쁘신 속에서도 귀중한 시간을 내시여 14살 나던 김명숙의 가야금연주를 보아주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앞못보는 소녀가 재치있게 손을 놀리는것이 기특하다고 하시면서 평양음악무용대학에서 그의 재능을 더 활짝 꽃피워주도록 은정어린 조치를 취해주시였습니다.

그러시고는 나어린 소녀가 눈을 보지 못하는것이 못내 가슴아프시여 큰 병원에서 치료를 받도록 해주시고 고급안경도 선물로 보내주시며 아낌없는 사랑과 배려를 돌려주시였습니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장군님께서는 평양음악무용대학 가야금연주가로 있는 김명숙선생이 민족기악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고 높이 평가해주시며 공훈예술가의 명예칭호를 안겨주도록 하시였습니다.

몇해전 김명숙선생이 조선장애자교류단의 한 성원으로 영국과 프랑스를 방문하여 공연을 진행하였는데 공연을 관람한 수많은 외국인들은 《장애자들이 이렇듯 훌륭하게 악기를 연주하고 춤을 출수 있다는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육체가 정상인 사람들도 힘들어하는 악기를 능숙하게 다루어가는 이들의 모습에서 조선의 우월한 장애자보호정책과 진정한 인권이 보장되는 조선의 현실을 보았다.》고 깊은 감동을 표시하였습니다.

자고로 장애자라고 하면 불행의 대명사로 되여왔습니다. 그러나 인민사랑의 정치가 펼쳐진 우리 공화국에서는 김명숙녀성만이 아닌 모든 장애자들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안고 세상에 부럼없는 삶을 누려가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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빤스먹사 물러가라 - 경기도 - 음악인
2020-09-01
 
김명숙 선생의 연주실력 최고입니다~!!!!
보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