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10(2021)년 8월 26일
추천수 : 1

《전설의 무희》로 소문났던 최승희선생에 대해 알고싶어요

 

문 – 지난 세기 《반도의 무희》, 《세계적인 무용가》로 이름날렸던 최승희선생에 대해 알고싶습니다. 그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소개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민족무용 – 중국 심양 – 무용애호가)

답 – 위대한 수령님들의 따사로운 품속에서 자기의 예술적재능을 마음껏 꽃피우며 명성을 떨친 무용가 최승희선생은 온 나라가 다 아는 이름있는 예술인의 한사람이였습니다.

1910년대 초에 망국노의 설음을 안고 이 땅에 태여난 최승희선생은 어린 시절부터 나라를 빼앗긴 민족의 운명을 뼈저리게 체험하지 않으면 안되였습니다. 그가 민족무용과 인연을 맺게 된데는 남다른 사연이 있었습니다. 가혹한 일제식민지통치시기 일명 《신경향파》문학으로 불리운 진보적작가들의 운동으로 1920년대 중엽에 발족된 《조선프로레타리아예술동맹》(《카프》)성원들중에는 최승희의 오빠 최승일도 있었습니다.

당시 일제의 탄압속에서도 진보적작가, 예술인들에 의하여 연극, 영화, 음악, 미술은 일정한 발전을 가져왔지만 변변한 춤가락도 없고 이렇다할 무용가도 없었던 탓으로 민족무용의 무대화실현에서는 일련의 진통을 겪고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몹시 마음써오던 최승일은 미모가 뛰여난 누이동생에게 무용가가 될것을 권고하였으며 마침내 최승희선생은 오빠의 설복에 의해 민족무용가로서의 첫 걸음을 내디디게 되였습니다.

주체15(1926)년에 조국을 떠나 낯설고 물설은 일본땅에 건너간 그는 도꾜이시바꾸무용연구소의 연구생으로 되여 무용을 배웠으며 3년후인 주체18(1929)년 8월에는 조국에 돌아와 《최승희무용연구소》를 내오고 민족무용연구와 창작에 정열을 기울이였습니다.

왜색왜풍의 탁류속에 시들어가는 민족의 넋을 고수하고 민족적인것을 발전시키려는 고뇌와 모대김속에서 최승희선생은 끝내 성공의 희열을 체험할수 있었으며 뭇사람들로부터 앞으로 전도가 촉망되는 무용가로 평가되였습니다.

최승희선생의 조선민족무용발표회이후 민족성이 고취되는것을 두려워한 일제는 제땅에서 제 나라 춤을 추는것까지 금지시켰습니다. 하여 그는 또다시 일본에 건너가 도꾜 한복판에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차려놓고 어깨가 들썩이는 조선장고소리를 울리면서 무대우에서 조선치마저고리를 입고 우아한 춤가락을 펼쳐놓아 조선민족의 슬기와 재능을 떨치였습니다.

당시의 출판보도계는 그의 천부적인 무용가적기질과 눈부신 활약을 두고 《반도의 무희》, 《미모와 기량이 뛰여난 세계적인 무용가》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최승희선생의 무용은 국내에서뿐아니라 문명을 자랑하는 프랑스, 도이췰란드 등 유럽나라들에서도 열렬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이 나날 그가 가슴아프게 체험한것은 무대우에서 받은 열광의 박수갈채와는 달리 무대밖에서 식민지민족에게 보내는 동정의 눈길이였고 진정한 예술을 꽃피워줄 민족재생의 은인을 애타게 그리는 몸부림이였습니다. 무용예술에 대한 포부를 안고 아시아와 유럽, 아메리카지역을 드나들며 예술활동을 벌려온 그였지만 그때마다 명예와 수치를 다같이 체험하며 다시 일본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안되였고 조국이 해방되기 직전에는 중국에 넘어가 예술활동을 벌리였습니다.

주체34(1945)년 8월 15일, 조국해방의 날을 이국에서 맞이한 그는 10여년간의 타향살이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왔으나 미제와 그 앞잡이들이 살판치는 남조선땅에서 민족무용을 마음껏 해보려던 그의 소중한 꿈은 여지없이 짓밟혔습니다.

그러한 그에게 위대한 태양의 빛발이 비쳐들어 광명의 길이 열리게 되였습니다. 절세의 애국자이시며 민족해방의 은인이신 어버이수령님께서 주체35(1946)년 초 그를 몸소 평양으로 불러주시였던것입니다.

그해 8월 평양에 올라온 그는 어버이수령님의 크나큰 사랑속에 《최승희무용연구소》 소장의 직책을 지니게 되였으며 수령님께서 몸소 자리를 잡아주시고 품을 들여 지어주신 연구소에서 마음껏 예술적재능을 꽃피울수 있었습니다.

공화국의 품에 안기기 전에는 변변한 집이 없어 세방살이 아니면 연구소에 잠자리를 정하지 않으면 안되였던 그를 좋은 집에서 살도록 해주시고 새 민주조선건설로 한푼의 자금이 긴장할 때에도 국가로부터 많은 자금을 받으며 무용연구소와 무용학교를 운영할수 있도록 해주신분은 바로 우리 수령님이시였습니다.

어버이수령님의 뜨거운 사랑과 은정은 그후에도 계속 이어졌습니다. 나라의 운명을 판가리하던 준엄한 조국해방전쟁의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최승희선생을 전선도 후방도 아닌 다른 나라에 보내시여 무용후비교육과 민족무용연구에 전심할수 있게 해주시였습니다.

이 나날에 그는 민간무용과 궁중무용 등을 깊이 파고드는 한편 민족적정서가 뚜렷하고 동작이 우아한 춤가락들을 하나하나 찾아내여 《조선민족무용기본》과 《조선아동무용기본》의 집필을 완성하였습니다. 이와 함께 소품들인 《풍랑을 뚫고》, 《조선의 어머니》, 《농악무》, 《물동이춤》, 《칼춤》, 《북춤》, 《부채춤》, 《양산도》, 《환희》, 《목동과 처녀》와 무용조곡 《평화의 노래》, 장편무용극들인 《사도성의 이야기》, 《계월향》, 《유격대의 딸》 등 애국적인 력사적소재를 가지고 다양한 무용형식을 창작도입하여 조선민족무용사를 풍부히 하고 현대조선민족무용발전의 기초를 마련하는데 많은 기여를 하였습니다.

그의 예술적재능과 창작적성과를 귀중히 여기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최승희선생을 사회활동가로, 관록있는 예술인으로 내세워주시였습니다.

지난날 망국노의 쓰라린 설음을 안고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아다녀야만 했던 최승희선생은 백두산절세위인들의 한없이 따사로운 품속에서 인민의 사랑받는 인민배우로 자라났으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조선무용가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 무용학교(당시) 교장, 국립무용극장(당시) 총장의 직책을 지니고 오래동안 사업하였습니다.

그가 사망한 후에도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한생을 민족무용발전에 바친 최승희선생을 잊지 못해하시면서 그를 애국렬사릉에 안치하도록 하시여 온 민족이 아는 무용가로 내세워주시였습니다.

참으로 최승희선생의 한생은 민족의 참다운 위인을 모실 때에라야 영원한 삶도, 소중한 재능도 활짝 꽃피울수 있다는 진리를 새겨주고있습니다.

Facebook Twitter LinkedIn Google Reddit Pinterest KakaoTalk Naver  
 
보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