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10(2021)년 8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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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의 연극배우였던 한진섭선생에 대해 알려주세요

 

문 – 저는 연예계의 멋진 스타가 될 꿈을 꾸고있는 사람입니다. 아직 초학도에 불과한 저는 지금 간단한 연극들에 출연하군 한답니다. 그런데 개성이 다른 역들을 수행한다는것이 말처럼 쉽지가 않아요. 그래서 가끔씩 조국의 영화나 연극을 보군 합니다. 우리 오랜 선배들이 이야기하는데 조국에 한진섭선생이라고 긍부정역을 막힘없이 잘하는 배우가 있었다더군요. 그에 대해 좀 이야기해주세요. (양선 – 재중 – 연예인)

답 - 20세기의 문예부흥기로 세인을 놀래운 공화국의 그 격동적인 년대들에는 공로를 세운 예술인들이 적지 않게 기록되여있는데 그들가운데는 우리 나라 연극계에서 원로로 불리운 인민배우 한진섭선생도 있습니다.

한진섭선생은 자기의 이름보다도 혁명연극 《성황당》에서 황지주, 《혈분만국회》에서 서대감, 예술영화 《조선의 별》에서 우사령, 예술영화 《유격대의 오형제》에서 준혁의 아버지, 예술영화 《군당책임비서》에서 최관배로인으로 우리 인민들속에 널리 알려져있습니다.

그는 각이한 시대, 각이한 계층의 각이한 직업을 가진 인물, 다시말하여 긍정인물이건 부정인물이건, 주역이건 단역이건, 또 정극적인 인물이건 희극적인 인물이건 어떤 배역도 능숙하게 형상해내는 만능배우였습니다.

한진섭선생의 한생을 한마디로 함축하여 표현한다면 아마도 이 말이 적중할것입니다. 소년로동자로부터 연극계의 원로로.

망국의 비운이 짙게 드리웠던 1914년 5월 경기도 김포시의 가난한 농민의 가정에서 태여난 한진섭선생은 13살때부터 인천항과 인쇄공장, 양말공장, 양철공장을 떠돌아다니면서 견습공으로, 부두로동으로 고역을 치르었습니다. 하여 10대에 벌써 못해본 일이 없고 어떤 일에나 숙련된 소년로동자가 되였습니다.

당시 위대한 수령님께서 이끄시는 조선인민혁명군의 투쟁소식을 전해들으며 혁명의식이 싹트게 된 한진섭선생은 비밀독서회 회원으로 활동하던중 일제경찰의 체포령을 받고 피신하지 않으면 안되였습니다. 일제놈들의 체포령으로 하여 그는 타향에서도 마음껏 제 얼굴을 드러내고 살수 없었습니다. 출로를 모색하던 그가 피신처로 삼은 곳이 바로 중국 동북지방에 있던 어느 한 류랑극단이였습니다.

그는 극단에서 처음에는 수레공, 무대잡부로 일하면서 고생을 많이 하였습니다. 극단에서는 간혹 배우들이 모자라면 무대우를 한번 걸어지나가는것과 같은 단역에 그를 출연시켰는데 그것이 한진섭선생이 연극무대와 맺은 첫 인연이였습니다. 차츰 무대우에 오르는 회수가 많아지면서 잡부의 인생과 결별하고 연극인은 되였지만 상가집 개만도 못한 수난자의 처지와 더불어 차례진것은 거지같은 광대라는 가혹한 멸시와 천대뿐이였습니다.

나라가 해방되자 한진섭선생은 새 조선의 연극무대에 나서게 되였습니다.

새 조선의 첫 세대 연극인이 되여 보람찬 창조활동을 벌리던 그의 간절한 소원이 풀리는 날은 오고야말았습니다. 해방후에 창작된 어느 한 연극을 보아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가 맡은 연기를 잘한다고 높이 평가해주시였던것입니다.

그는 수령님께서 계셔야 조국도 있고 자기의 운명도 있다는 철석같은 신념을 간직하고 조국해방전쟁이 일어나자 용약 전선에 나가 다채로운 화선공연으로 싸우는 인민군군인들을 힘있게 고무추동하였습니다. 그가 어중이떠중이들의 궤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20여명의 예술인들과 함께 최고사령부를 찾아 간고한 북행길을 성과적으로 헤쳐올수 있은것은 혁명적신념이 투철했기때문입니다.

1960년대에 그가 위대한 수령님을 형상한 혁명연극 《승리의 기치따라》에서 맡겨진 연기를 훌륭히 수행할수 있은것도 수령에 대한 티없는 충성심을 떼여놓고 생각할수 없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가 출연하는 작품들을 보시면서 연기가 개성이 있다고, 참 구수하다고, 관록이 있다고, 진실하고 생동하다고, 눈물이 난다고 하시며 수십차례에 걸쳐 높이 평가해주시였습니다.

주체67(1978)년 8월 31일,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혁명연극 《성황당》을 보아주시고 한진섭동무가 황깍쟁이역을 아주 잘하였다고 높이 평가해주시였으며 그를 자신의 옆자리에 불러주시였습니다. 감격에 겨워 그냥 눈물만 흘리는 그를 보시고 자꾸 눈물을 흘리면 사진이 잘 안된다고 하시면서 그의 손을 다정히 잡아 자신의 옆자리에 앉혀주시고 영광의 기념사진을 찍어주시였습니다.

한진섭선생은 수십년의 배우생활기간 90여편의 연극들과 20여편의 영화들에서 주역을 담당수행하였는데 그중 많은 작품들이 인생의 황혼기라고 할수 있는 60대, 70대에 출연한 작품들이였습니다. 당과 수령의 사랑과 믿음에 마지막 피 한방울까지 깡그리 다 바쳐 보답하려는 충성의 열도로 변함없이 심장을 불태우는 혁명가는 로쇠와 침체를 몰랐습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주체77(1988)년 3월 혁명연극 《경축대회》공연을 보아주시는 뜻깊은 자리에서 혈압이 높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어떤가고, 이제는 나이가 많은데 몸을 잘 돌보아야 한다고, 너무 무리하게 일하지 말고 고문역할이나 하면서 젊은 연출가들과 배우들을 많이 키워 우리 연극계의 대를 이어나가야 한다고 그에게 간곡히 당부하시였습니다. 이렇게 되여 국립연극단에는 한진섭선생을 위한 배우연기지도고문이라는 새로운 직제가 나오게 되였습니다.

배우연기지도고문, 이 직제야말로 후비육성을 위해 늘 마음쓰고 실천적모범으로 새세대들을 이끌어온 한진섭선생의 한생에 대한 또 하나의 값높은 평가였습니다.

한진섭선생은 한생토록 쓴 부피두터운 여러권의 수기집과 채 완성하지 못한 도서원고 《배우연기수업》을 남기였습니다.

주체83(1994)년 3월, 우리 당이 아끼고 사랑하는 전사를 잃은데 대하여 못내 가슴아파하시며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한진섭동무는 인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은 관록있는 배우였다고 하시면서 정말 아까운 동무를 잃었다고 뜨겁게 교시하시였습니다. 그러시고는 그의 령전에 몸소 화환을 보내주시고 신미리애국렬사릉에 안치하도록 크나큰 사랑을 돌려주시였습니다.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께서는 그가 세상을 떠난지도 수십년이 지난 2014년 5월 그의 생일 100돐을 잊지 않으시고 한진섭선생을 회고하는 뜻깊은 모임을 진행하도록 해주시고 널리 소개하여 그의 공적을 온 나라가 알도록 해당한 조치도 취해주시였습니다.

이렇듯 한진섭선생의 일생은 백두산절세위인들의 숭고한 사랑을 떠나 생각할수 없는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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