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5(2016)년 3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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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120년전의 비화

 

하늘의 별들도 피곤에 몰려 깜박깜박 조으는 이른 새벽, 두 《궁녀》가 뉘에게 들킬세라 발자욱소리를 죽여가며 살며시 교자에 올라 동문을 향해 조심조심 다가간다. 추위에 떨며 서있던 파수병들은 다행히도 아무런 의심없이 교자를 바라만 볼 뿐 멈춰세우지 않는다. 특별한 리유가 없는 한 궁녀들의 교자는 검문하지 않는 관행때문이다. 허나 궁녀의 옷을 입고 어둠에 잠긴 궁궐을 빠져나가는 두 《궁녀》가 다름아닌 임금과 왕세자일줄은 아직 누구도 모르고있었다. 임금이 왕궁을 탈출하고있었던것이다.…

이것이 지금으로부터 120년전인 1896년 2월 11일 새벽 서울의 경복궁에서 벌어진 일이다. 사가들은 이 보기 드문 사건을 가리켜 임금이 아라사(로씨야)공사관에 피난하였다는 의미에서 《아관파천》이라 기록하였다.

흔히 력사는 반복된다고들 한다. 한 나라의 국왕이 전제권력의 심장부인 왕궁을 버리고 외국의 협소한 공관으로 피난하였던 그날의 슬픈 이야기에 비낀 교훈의 무게는 오늘에도 결코 가볍지 않다.

외세를 끌어들이는것은 스스로 독약을 먹는것과 같다. 당시 조선봉건왕조의 대외정책은 《이이제이(以夷制夷)》로 요약되였다. 허나 오랑캐로써 오랑캐를 제어한다는것은 천진한 꿈일뿐이였다. 대국들의 눈에 비친 조선은 자원은 풍부하되 힘은 없는 약소국가에 불과했으니 어느 렬강이 약소국의 뜻대로 움직일수 있겠는가. 왕권의 안정을 위해 여러 대국들을 련이어 받아들였으나 그것은 스스로 집안에 강도들을 끌어들이는 짓으로밖에 되지 않았다. 결국 궁중에 뛰여든 왜놈들에게 황후가 목숨을 잃고 임금마저 생명을 위협당하는 지경에 이르러 야밤도주하지 않으면 안되게까지 된것이다.

남을 위해 진정을 바치는 《사심없는 우방》이란 있을수 없다. 이 또한 오늘에 다시금 새겨봐야 할 교훈이다. 고종이 기대를 가지고 찾아간 아라사공사관도 천국은 아니였다. 짜리로씨야는 공사관에 《모셔온》 고종을 조종하여 친로정권을 조작한 다음 압록강연안과 경성, 종성 등지에서의 채광권과 서울-원산사이의 전신선시설권을 비롯한 여러가지 리권을 획득하였으며 나중에는 조선봉건정부의 군사권과 재정권까지 틀어쥐였다. 일본의 마수로부터 《구원》해준 대가로 모든 실권을 빼앗은것이다. 결국 고종은 비를 피해 못에 뛰여든것이였다. 타민족을 위해 자기를 바치는 사심없는 렬강이란 애당초 력사에 있어본적 없는것이다.

힘이 없으면 모든것을 잃어야 한다. 모든 비극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였다고 볼수 있다. 지대한 존엄의 상징이라던 국왕이 왜서 집잃은 나그네신세가 되였는가. 군대다운 군대가 다문 얼마라도 있었다면 임금이 궁녀로 변복하고 왕궁을 탈출하는 부끄러운 짓은 하지 않아도 될것이였다. 군력이 약했기에 왕궁은 있어도 임금이 거처할 곳은 없었고 군사는 있어도 임금을 지켜줄 군사는 없었으며 외국공관에 몸을 맡길수밖에 없었던것이다. 자기의 힘이 없으면 남에게 빌붙을수밖에 없고 남이 이끄는대로 끌려다닐수밖에 없으며 나중엔 존엄도 명예도 국권도 모두 잃게 된다는것, 이것이 민족의 수난사에 진하게 새겨진 교훈인것이다.

《아관파천》, 그때로부터 만 12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력사의 이끼는 수북이 덮이였어도 민족의 수치로 씌여진 망국망족의 교훈들은 가리워지지도 변하지도 않고있다.

유감스럽게도 민족문제에 외세를 끌어들이며 외세의 간섭을 허용하는 자들은 지금도 없는것이 아니다. 《혈맹》과 《우방》을 떠들며 외세공조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자들도 적지 않다. 민족의 안녕을 지켜주는 귀중한 보검을 《위협》으로 매도하는 자들도 있다.

사가들은 이들을 력사의 교훈을 망각한 사대매국노라고, 하여 민족의 운명에 막대한 해독을 끼친 반역자들이라고 기록하게 될것이다.

조창진 - 력사연구소 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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