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5(2016)년 10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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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련희 수기 《따뜻한 내나라》 (5)

고난의 행군 2 - 군인들을 가족처럼

- 남조선인터네트신문 《자주시보》 9월 27일부에 실린 글 -

 

우리 부대에는 한달에 한번씩 《병사의 날》이 있다. 이 날은 부대관하 군인가족들이 음식을 준비해가지고 부대 군인들을 찾아가는 병사들을 위한 날이다.

나라를 지키고 인민을 지키는 우리 군인들에게 자기 손으로 만든 음식을 한가지라도 더 대접하고 싶어하는것이 우리 군인가족들인 어머니, 누나, 언니들의 한결같은 마음이다. 반찬의 종류는 정해진것이 따로 없고 각기 자기 성의가 어린 음식감들을 만들어 내온다. 내 손으로 만든 음식을 내 동생같은 병사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볼 때면 가슴이 뿌듯하고 흐뭇하다.

나는 만두를 빚는것이 특기라 항상 만두를 빼놓지 않고 빚군 하였는데  군인가족들 모두가 모양이 곱다며 내 손을 부러워하였다. 우리 군인가족들은 각곳에서 오다나니 음식도 전국의 특색있는 음식을 다 먹어볼수 있었다.

명절때는 가족들이 군관들, 병사들과 함께 조를 뭇고 예술공연도 하였고 체육대회도 하군 하였다. 그럴 때면 언제나 우리 딸이 앞에 나서서 태권도시범동작을 하군 하였다. 딸은 7살때부터 태권도를 배웠다. 녀자여서 나는 완강하게 반대하였지만 딸은 집안에 앉아 주먹으로 방바닥을 내리치는 련습도 하고 마당에 모래주머니를 만들어 놓고 발로 차면서 태권도를 배우게 해달라고 계속 조르는것이였다. 어쩔수 없어 하루는 딸을 데리고 15리나 떨어진 시내 체육구락부를 찾아가 태권도지도교원에게 사정을 이야기하면서 우리 딸이 꽤 할수 있는지 좀 봐달라고 하였다. 선생님은 딸의 손과 체격을 자세히 보더니 시켜보는것이 좋겠다는것이였다. 그렇게 되여 딸은 부대에서 차로 1시간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체육구락부에 다니면서 태권도를 배우게 되였고 몇년후에는 엄마인 나조차 놀랄만큼 대단한 실력을 가지게 되였다. 부대에서는 우리 딸의 실력이 너무 대견하여 명절때마다 딸의 시범을 보고싶어하였다.

고난의 행군이 계속되면서 우리 군인가족들은 집이 아무리 어려워도 한달에 한번씩 진행되는 《병사의 날》만은 어김없이 진행하였고 부대주변 농장마을의 유치원에 자주 찾아가 아이들에게 먹을것을 나누어 주군 하였다.

주민들은 우리가 아무리 힘들어도 군인가족들만큼 고생스럽겠는가고 하면서 자기 가족보다 군인들과 이웃마을 인민들, 그리고 아이들을 위하는 우리 군인가족들이 대단하다고 하였다.

2002년 아버지의 생일 60돐이여서 나는 남편, 딸과 함께 평양에 있는 본가로 올라가게 되였다. 부모님곁을 떠나 지방에서 군인들과 함께 바쁜 나날을 보내다가 5년만에 다시 부모님을 뵈오러 평양에 간다고 생각하니 어린애마냥 마음이 둥 떴다.

생일선물을 고민하던 끝에 나는 3일동안 한뜸한뜸 지성을 담아 아버지의 외투를 만들었다. 더는 시간을 낼수가 없어 어머니의 선물은 시장에서 세타를 사서 준비했다. 정성껏 준비한 선물들과 그해 내가 농사지은 콩, 강냉이, 쌀, 팥을 배낭에 한가득 담아지고 우리 가족은 드디여 그토록 그립던 부모님곁으로 가게 되였다.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남동생이 제법 아들 몫을 한다며 상차림에서부터 구석구석 빈틈없이 신경을 많이 쓴것이 참 대견하였다. 특히 큰 수술을 두번이나 해서 항상 속을 조마조마하게 했던 아버지가 오늘까지 건강하여 우리 곁에 계셔준것은 전적으로 어머니의 정성이였다며 비로도 치마저고리를 마련해 어머니에게 드리는 속깊은 동생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후더분해지며 든든하였다.

생일날에는 지금까지 진실한 우정을 이어오신 40년전 군사복무때의 친구분들과 현재 공장에서 함께 일하시는 분들, 어머니의 병원선생님들, 그리고 우리 삼형제의 가족들이 모두 모여 아버지를 축하해 드렸다. 우리 삼형제가 힘을 합쳐 처음으로 맞는 가족의 큰 행사여서 참으로 뜻깊은 의미로 가슴속에 깊이 자리잡았다.

나는 오래간만에 온 집이여서 부모님, 그리고 형제들과 3일동안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그저 기쁘기만 한것이 아니였다. 5년만에 다시 보는 평양의 곳곳에는 힘겨운 고난의 흔적들이 여기저기 아픈 상처로 남아있었다. 평양의 아빠트들은 온수가 돌지 않아 힘겹게 추위와의 싸움을 하고있었고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승강기가 운영되지 못하니 20층이 넘는 아빠트를 걸어서 올라가야 했으며 물이 나오지 않아 세수물과 위생실에 필요한 물을 등짐으로 높은 층까지 지고 올라가야 했고 저녁이면 등잔불밑에서 연기 끄스름을 맡아가며 밥술을 떠야 했다.

지방이긴 하지만 따뜻한 아래목에서 생활해오던 8살 잡힌 딸은 추위를 몹시 탔다. 그래서 우리는 5ℓ짜리 물통에 뜨거운 물을 담아 이불속에 넣고 잠자리를 덥혔다. 그 통의 물은 새벽까지 온기를 보장해 주었다. 아버지, 어머니는 방바닥이 너무 차서 솜버선을 신고 지냈으며 대낮에도 방안에서 솜동복을 벗지 못하고 지내셨다.

지방에서는 터밭에서 생산한 남새, 농작물과 산나물, 집짐승들이 식량위기에 큰 도움이 되였고 겨울이면 산에 올라가 해온 나무들이 추위를 막아주어 그 어려운 고난의 시기를 견딜수 있었는데 평양에서는 우리보다 몇배 더 어렵고 힘든 나날을 이겨내고있다는 안타까운 생각이 가슴을 아프게 하였다.

3일간의 평양행을 마치고 부대로 다시 내려가면서 나는 안정된 생활속에서 활기에 넘쳐 행복하게 살아가는 그토록 소중한 우리의 삶의 요람을 깨뜨리고 아름다운 삼천리금수강산, 우리 사회주의조국을 삼키려고 세계최악의 경제봉쇄를 가하며 악랄하게 날뛰는 미제국주의자들과 그 주구들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으로 가슴 불태웠다. 그리고 우리 자식들에게는 그 어떤 외세도 감히 덤벼들수 없는 가장 위대하고 강대한 조국을 물려주기 위해서라도 우리 당의 선군정치를 받들어 병사들을 위해 나의 모든것을 깡그리 바치리라 굳은 각오를 다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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